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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에세이] 평화로 가는 길, 느려도 괜찮아
- Writer
- 관리자
- Date
- 2017.07.26
- Views
- 1333
무지개청소년센터 뉴스레터의 8월 주제는 "평화" 입니다.
김포지역에서 이주청소년과 일반청소년을 위한 평화교육을 고민하고 실천하는 고은초소장님(누구나예술연구소)의 글을 싣습니다.
평화로 가는 길, 느려도 괜찮아
"평화교육이라니, 그게 대체 뭔가요?”
평화교육 프로그램을 진행하고 있다고 하면, 예외 없이 돌아오는 질문이다. 평화를 배운다니, 안보교육이나 반전교육을 생각하는 이들도 있고, 마음수련 같은 걸 떠올리는 이들도 있다.
평화와 교육, 분명 알고 있는 두 단어의 조합인데도 도무지 가늠하기 힘든 평화교육이라는 말. 평화를 배운다는 건 대체 어떤 걸까? 아니 그에 앞서, 평화를 교육한다/배운다는 게 가능하긴 한 걸까?
평화교육을 이야기하기 위해서는 '평화가 무엇인가?'라는 고민이 앞서 필요하다. 전쟁의 상대개념으로만 평화를 가두기에는 아쉽다.
평화는 그보다 훨씬 더 크고 멋지다. 아무것도 하지 않는 고요의 상태로 평화를 이해하기에도 부족하다. 평화는 역동적이다.
나는 평화라는 단어를, 우리 사회에 존재하는 다양한 구조적 폭력과 권력, 금기를 깨뜨리고 몸과 마음을 자유롭게 하는 능력으로 받아들이고 있다.
평화교육은 바로 그 평화를 만들어내는 힘을 길러내는 과정이다.
평화교육을 처음 접하던 때가 생각난다.
평화로운 관계에 대한 막연한 호기심으로 교육에 참여했다가, 그 몇 주간의 경험이 내 일상을 뒤흔들어 놓았다.
무엇보다 그곳은 안전한 배움의 공동체였고, 차별없는 환대의 공간이었다. 만나는 순간마다 큰 동작과 목소리로, 눈빛으로 환대받고 환대했다.
크게 웃는 것도, 누군가의 손을 잡고 이야기하는 것도, 안아주고 안기는 것도 어색했던 어른들이 점차 서로를 얼싸안고, 여러 번 눈물을 훔치고, 열렬히 박수를 치며 서로의 존재를 진심으로 받아들여갔다. 그리고 어느 모임에서건 가장 말수 적고, 최후까지 낯을 가리던 나는 '달라도 괜찮고, 낯설어도 괜찮고, 느려도 괜찮다'고 말해주는 평화교육 안에서 자유롭고 따뜻했다.
그 이후로 줄곧 더 많은 사람들과 공유하고 싶었고, 무엇보다 청소년들에게 이 안전한 배움의 경험을 선물해주고 싶었다.
공부가 아니고서는 존재의 가치를 인정받지 못하는 아이들에게 '우리는 모두 다른 존재이고 존중받아 마땅하다'는, 실은 너무나 당연한 이야기를 해주고 싶었다.
당장 내가 살고 있는 지역에서부터 시작해보기로 했다. 나는 2년 전에 신도시로 이사를 왔는데, 지역 특성상 외국 이주민이 많고 다양한 계층의 사람들이 섞여 산다. 이사 와서 가장 많이, 흔하게 들은 말이 "폐쇄적인 동네다", "외국인노동자가 많아서 도시 분위기가 어둡고 칙칙하다", "갈등의 골이 깊다" 등이었다. 고민의 결과, 이주배경청소년과 일반청소년이 함께 어우러져 서로를 자연스럽게 이해해가는 평화교육 과정을 기획하게 되었다. 세상에 다양한 사람들이 산다는 그 당연한 사실을 새삼스럽게 인식하고 받아들이게 된다면, 어쩌면 우리는 혐오와 갈등의 모래사장에서 평화라는 바늘찾기에 성공할 수 있을지도 모르니까.
하지만 과연 바늘찾기가 쉬울 리는 없는 법. 아이들은 평화보다는 간식이 좋아서 온다. 강사가 전달하려는 배움의 의도는 수시로 어긋난다.
평화를 말하는 것이 왜 이리 어려운 노릇인가 싶다가, 쉬울 수 없는 것이 평화임을 상기한다. 왜냐하면 평화가 본디 불편함을 마주하는 일이기 때문이다.
나에게 특별하지 않은 사람의 사정에는 무관심한 것, 나와 다른 성, 세대, 지역, 계층, 외모, 취향 등에 혐오의 시선을 던지는 것, 부당한 권력과 힘의 논리에 말없이 복종해 온 것 등 평화를 원하는 이들은 그동안 우리에게 익숙했던 것들과 싸울 수밖에 없다.
내 몸과 마음에, 다른 존재에, 부당한 힘과 권력에 민감한 감수성을 지니기란 쉬운 일이 아니다. 배우는 이에게도, 말하는 이에게도 평화는 싸워야 하는 과정이다.
나는 평화로운 인간이 아닌데, 평화를 말하고 있구나. 희망을 품었다 절망했다 다시 희망했다 더 깊은 절망을 했다 다시 또 희망할 틈을 찾아보는 것이 평화로 가는 길의 무한 반복인가 싶기도 하다.
그러다 지난주에는 다시 희망의 차례였다.
프로그램에 참여하는 학생 중 유난히 말이 없고 소극적인, 있는 듯 없는 듯 존재감이 적은 아이가 있었다.